| 한 해를 마감해야 하는 시기이다. 바둑계도 어김없이 수확량을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06년 한 해 동안 우리의 가슴을 끝없이 달구었던 숱한 세계타이틀전이 벌어졌다. 어느 국가 어느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올해 벌어진 대회 중 우승자(우승국)를 가린 세계대회는 삼성화재배(1월)·농심신라면배(2월)·강원랜드배(3월)·LG배(4월)·CSK배(5월)·후지쓰배(7월)·TV바둑아시아선수권(8월) 등 7개. 또한 격년제로 벌어지는 도요타덴소배·춘란배에서는 결승진출자를 가려놓은 상태이다. 총 9개 대회의 결산보고서이다.
삼성화재배에서 두 번이나 ‘물을 먹었던’ 후야오위와의 4강전이 어려웠지 결승서 만난 뤄시허는 쉬운 상대였다. 그는 중국랭킹 13위였고 상대전적에서는 4전 전패를 기록 중이었다. 따라서 세계대회 22회 우승에 빛나는 이창호에게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올해부터 제한시간이 2시간으로 단축된 사실을 뤄시허는 반겼다. 속기의 명수이자 IQ 160의 천재 뤄시허는 이창호와 속기난타전을 전개한 끝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창호는 그 바둑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작전과 어설픈 전투를 일삼는 등 전술적인 아노미상태를 보였다. 뤄시허는 외국선수로는 처음으로 결승전에서 이창호를 꺾었으며, 삼성화재배 사상 처음으로 통합예선부터 출전해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본선 32강전부터 조한승·송태곤·이세돌·최철한·이창호까지 한국랭킹 10위 이내의 기사를 모조리 격파하는 이변을 연출하였다. 그는 중국의 영웅이 되었고 이창호는 이후 ‘알 수 없는’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한국은 05년 대회에서 극적인 막판 5연승으로 ‘불패신화’를 이어간 이창호가 버티고 있는 뒷문이 자랑. ‘미학자’ 조한승이 2차전에서 2연승의 상승세를 달리고 있다는 점 또한 한국을 우승후보로 내세우기에 적합했다. 또한 대회가 6회를 치르는 동안 한국이 우승을 도맡아 해왔다는 점 또한 무시 못 할 요인.
■ 제7회 농심신라면배 3차전 대진표
막을 올리자마자 2승의 조한승은 중국의 2장 창하오 마저 이겨서 3연승을 내달렸다. 그 다음 일본의 주장 요다 노리모토와 맞닥뜨렸으나 그만 불계패를 당하고 만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이제 한·중·일의 주장만 남았다. 그래도 이창호는 1승만 거두면 될 것이고 일본과 중국은 2승을 더 올려야 하는 상태. 여기서 ‘카리스마’ 요다의 괴력은 발휘되었다. 중국의 주장 쿵제와 한국의 주장 이창호를 거푸 꺾어 버린 것. 요다의 3연승으로 일본은 첫 우승의 감격을 경험한다. 삼성화재배 ‘은메달’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원년대회를 시작으로 내리 6연패에 성공하며, 특정 선수의 기량 뿐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바둑의 강세를 확인하던 단체전이었다. 이창호도 개인적으로 이어오던 대회 농심배 14연승도 마감되었다. 3월=강원랜드배 中 우승(주장-창하오) 역시 예선전을 통해 국가대표를 가려낸 중국은 창하오·뤄시허·구리·왕시·천야오예·박문요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출전했다. 멤버 구성상으로는 중국이 조금 더 강해 보이지만 한국도 이창호·이세돌 등 에이스가 출전하여 녹록하지 않은 승부가 예상되었다. 이세돌이 첫 번째 주자로 나선 한국은 상큼하게 1승을 거두었으나 중국의 천야오예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혼전이 이어진다. 천야오예는 홍성지 마저 제치고 2연승. 그러나 한국에는 ‘비밀병기’ 안조영이 있었다. 천야오예를 제치고 왕시·뤄시허에게 연속으로 반집을 남기며 ‘반집의 승부사’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3연승.
■ 제1회 강원랜드배 한중바둑대전 결과
이제 한국은 주장 이창호가 남았고 중국은 창하오·구리가 이창호를 협공하는 형국이 되었다. 예년 같으면 쉽게 2승 ‘정도’는 해줄 이창호였다. 그러나 농심배 이후 2연속 구원에 실패하며 또 다시 ‘블론세이브.’ 상대전적 20승5패의 ‘밥’ 창하오에게 완패를 당해 이창호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고 말았다. 창하오의 막판 4연승으로 중국우승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그동안 철문으로 생각하던 한국의 빗장이 열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한중간의 화려한 빅뱅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강세를 증명하는 대회가 되고 말았다.
중국랭킹 1위와 14위의 대결. 막상 뚜껑을 열자 2대2의 팽팽한 승부가 전개되었다. 결국 마지막 판을 구리가 이겨 ‘형님’이 먼저 우승을 차지했다. 중국은 비록 졌지만 당찬 바둑을 보여준 천야오예를 발굴해내 '1승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5월=CSK배 中 우승(주장-구리) ■ 제5회 CSK배 아시아바둑대항전 3회전 결과(한국 대 중국)
또한 최철한도 중국의 비밀병기 씨에허에게 큰 차이로 패하며 한국의 우승 전선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이창호가 강원랜드배의 아픔을 딛고 창하오를 꺾으며 분위기 반전에 나서는 듯 했으나, 뒤이은 고근태가 중국의 실력자 쿵제에게 패해 중국의 우승으로 결정되고 말았다. 딩웨이와 맞붙은 박영훈이 막판 반집승을 거뒀으나 이미 승부는 결정되어 버린 다음이었다. 05년 응씨배를 필두로 삼성화재배 LG배 등 세계무대를 장악하며 한국의 자존심을 건드린 중국. 이젠 농심배 강원랜드배 CSK배마저 접수하며 세계바둑계 지각 변동의 핵으로 등장했다.
7월3일 제19회 후지쓰배 결승 단판승부에서 박정상이 중국의 저우허양을 누르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한국은 후지쓰배에서 유창혁이 93년 첫 우승을 안긴 이래 통산 12회 우승컵을 차지하게 됐으며, 11회부터 19회까지 9년 연속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박정상은 ‘빅4’와 함께 8강에 올랐지만 그가 우승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본선에서 장밍주(미국)·하네나오키(일본)·창하오(중국)를 물리쳤다. 그리고 4강에서 최철한을 물리치며 강력한 우승후보로 등장한다.
결승은 쉬웠다. 아무도 없었다. 저우허양이 이세돌·박영훈을 꺾어주는 바람에 오히려 결승에서는 ‘흘러간 스타’ 저우허양을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끝에 드디어 그의 이름처럼 ‘정상’에 섰다. 세계대회 우승에 목말랐던 한국에게 첫 우승의 감격을 안겨주었으며 후지쓰배 불패신화도 이어가게 되었다. "천재라는 건 없다. 남들보다 10배 노력하는 사람이 일류가 되고 그 사람보다 10배 더 노력하는 사람이 최고가 된다." 입단 6년의 짧은 프로 경력을 지닌 박정상은 차근차근 전진해 온 대기만성의 기사. 국내에서도 본격 타이틀을 따낸 경험도 없던 그가 세계타이틀부터 따냈다는 것은 한국바둑의 수준이 세계바둑 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쾌거. 8월=TV아시아바둑선수권 中 왕시 우승 (대 이창호 2대1)
TV바둑아시아선수권은 KBS, NHK, CCTV 등 아시아 3국의 공영방송이 공동주최하는 세계 최고의 속사포 경연장. 각국 속기대회의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출전하는 초경량 세계기전이다. 그런데 속기에서도 한국은 중국에 무너졌다. 8월 11일 서울에서 벌어진 제18회 TV바둑아시아 결승에서 중국의 왕시가 ‘철권’ 이창호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유창혁·장쉬를 꺾고 결승에 오른 왕시. 이마무라도시야, 하네나오키를 꺾고 결승에 오른 이창호. 이창호에게 상대전적 2전 2패로 열세를 보여 왔던 왕시는 그동안의 패배를 만회하려는 듯 초반부터 적극적인 행마를 보인 끝에 150여 수만에 일인자를 주저 앉혔다. 왕시는 첫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까지 차지하며 일약 중국바둑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중국은 왕시의 우승으로 올해 벌어진 세계대회에서 5번째 우승컵을 획득했다. 한편 이창호는 02년에 우승을 차지한 이래 4년 만에 정상 등극을 노렸으나, 아쉽게도 통산 4회의 준우승 기록만 갱신하였다.
이세돌은 이창호를 맞아 초반 중앙 제공권을 장악한 뒤부터 유연한 국면운영과 돋보이는 형세판단을 무기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이세돌은 상대전적 15승22패로 다소 열세에 놓여있지만 6월에 벌어진 후지쯔배 8강전과 이번 도요타덴소배 4강까지 이창호의 발목을 번번이 잡았다. 또한 장쉬는 박영훈을 맞아 초반에 완착을 범해 힘든 바둑을 미세하게 추격하다 역전에 성공했다. 박영훈과의 상대전적 2전2패를 딛고 결승행을 확정지은 장쉬는 지난 05년 LG배 우승 이후 두 번째로 세계대회 우승에 도전하게 된다. 10월=춘란배 中 우승확정 (구리 대 창하오) 그러나 결국 사건은 일어나고 말았다. 9월 28일 중국 광저우에서 제6회 춘란배 8강전에서 이창호 이세돌은 각각 구리와 씨에허에게 나란히 패배를 당하며 한국의 국제전 참가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4강 전원 탈락’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이른바 ‘광저우의 굴욕’이다. 이번 광저우의 패배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국랭킹 1,2위와 중국랭킹 1,2위가 동시에 맞대결을 벌였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이미 작년 3월 벌어진 16강전에서 고근태까지 고작 3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예견된 참패였다. 구리는 도요타덴소배 16강전 패배를 설욕하며 이창호와의 상대전적 2승3패로 따라 붙었다. 한편 이세돌에게 4전4승을 거둔 씨에허는 내년에도 가장 강력한 한국기사의 천적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06년의 부진을 07년 대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비록 중국이 놀랍게 성장했지만 아직은 한국을 추월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는 것이 다수의 중론. 다만 상대의 힘이 세졌다는 것을 실감했으니 대응도 다양해져야 할 것이다. 하반기의 한국바둑은 상당히 호조를 보였음을 기억한다. 새해에는 벽두부터 삼성화재배 결승과 LG배 4강전, 농심배 마지막라운드 등에서 한국기사의 분전소식이 들려올 것으로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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