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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오뚝이 안조영, 4전5기란 이런 것

4차례 준우승 끝에 입단 15년 만에 십단 타이틀 따내

진재호 바둑평론가2007-02-16 10: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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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겨도 생애 첫 타이틀을 따는 한판이었으나 바둑담당 기자 이외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세계적인 빅쇼에 흥분한 나머지 새로운 타이틀홀더가 탄생되는 순간을 우리는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일전 이창호가 역전 2연승으로 농심신라면배 우승을 거머쥐어 축제분위기를 타고 있었다. 또한 그날은 LG배 준결승이 이어지던 날이었다. 따라서 관심을 끌래야 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조영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

입단 15년 만에 십단전 우승
내리쬐는 스튜디오의 숱한 조명. 때마침 저승사자의 추상같은 같은 초읽기 소리는 들려오고… 서로 한판씩을 나눠 가진 다음 맞이한 최종국이었다. 상대가 누군가. 2006바둑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07년 바둑가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청년 백홍석이다. 결코 안조영보다 ‘예상득표’가 적지 않았던 강타자.

피차 뒤가 없는 막판 대국도 안조영이 초반부터 유리했다. 그러나 형세를 낙관한 탓인지 중반 들어서 백홍석의 추격이 빛을 발해, 이제는 누가 앞선다고 할 수 없는 상황. 좌변에서 백홍석이 실리를 탐하자, 대조영의 호령처럼 중앙 급소를 찔러간다. 순간, 파이터 백홍석의 얼굴은 홍조로 변색되어 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보통보다 낮은 높이에다 눈이 유독 빛나는 청년. 과묵함과 성실함이 브랜드인 청년 안조영이 마침내 한을 풀었다. 만만치 않은 맹장 이영구·이창호·송태곤·백홍석이 차례대로 그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 중에서 8강전에서 이창호를 꺾은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작년 우승자 이창호는 입단 이후 안조영에게 통산 13승(1패)를 기록한 천적이었다.


상처로 남아있는 4개의 은메달
안조영의 수읽기는 발군이다. 게다가 ‘반집의 제왕’ ‘장고의 달인’ 등의 닉네임에서 알 수 있듯, 끈질긴 승부욕을 갖추고도 그는 늘 정상 임박그룹에 머물렀다. ‘이번에는 기필코…’하는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욕심의 ‘후유증’을 네 번씩이나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모조리 은메달에 만족해야 하는 동안 얻었던 신예기전 2차례의 우승은 그에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했다.

안조영은 79년생이다. 93년 14세의 나이로 입단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여서 이창호 이후 세대 중에 크게 한몫을 할 줄 알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입단 3년 만에 삼성화재배에 오르며 이세돌·박영훈이 본격적인 등장 이전 이미 ‘황태자’로 인정받는다. 게다가 이듬해 신예프로10걸전에서 우승을 한다.


▲ 신인왕전 결승, 안조영(오른쪽) 대 이영구.

여기까지는 일류기사라면 누구나 걷는 ‘정규코스’이다. 이듬해인 98년에는 삼성화재배 LG배 등에 진출하더니 99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지금은 사라진 최고위전에서 철옹성 이창호에게 도전하게 된 것.

그의 나이 20세였다. 임전소감이 마르기도 전에 ‘어 어…’ 하다가 첫판을 놓치게 된다. 하필 도전기는 3번기였다. 일찌감치 막판에 몰려서 2국에서는 후회 없는 바둑을 두어보자고 다짐했으나 반집패였다. 하기야 그 당시는 이창호와 마샤오춘간의 한·중 헤게모니 싸움이 한창일 때였으니 그가 일인자를 넘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좋은 경험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때는 이창호를 이기리라고는 스스로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조훈현·유창혁·최명훈·이세돌 등 맹장을 제치고 도전자가 되었다는 자체로 만족했다. 2000년에 들어서도 LG배 후지쯔배 등 세계무대를 밟고 각종 국내기전에서 본선 물고기로 활약하면서 팔뚝을 키워갔다.


2002년 최강 이창호에게 두번 도전 실패
꾸준히 기다린 끝에 또 한 번 기회가 온다. 2002년 패왕전·명인전에서였다. 이제는 해볼 만하다고 느낀다. 이창호의 위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99년의 안조영도 아니었다. 나이로도 23세로 한창 때였으니, 3년 전처럼 한수 배우겠다는 자세는 분명 아니었다. 이겨보리라 작정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창호는 ‘안조영 킬러’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야 만다. 패왕전에서 안조영은 3대0으로 완패한다. 8전8패. 또 다시 명인전에서도 2국까지 2연패, 상대전적 10전10패를 마크한다. 그가 성장하면 할수록 이창와의 간극은 벌어져만 갔던 것이다.


▲ 2002년 명인전 결승, 이창호(오른쪽)과 결승전을 치르고 있는 안조영.

제 아무리 확고한 랭킹1위 이창호라지만, 안조영도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인고로 10전10패는 모욕이었다. 비슷한 기풍 탓이 컸다. 반집의 제왕이긴 하지만 ‘동급최강’ 이창호에겐 무용지물이었던 것. 10연패 끝에 1승을 기록한다. 어쨌든 세 번의 도전기에서 한판을 건진 것에 만족해야했다.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는다. 더욱 더 갈고 닦는다. 또 세어졌다. 당시 안조영은 10시간 가까이 가는 장기전은 거의 모두 승리하는 괴력을 선보이고 있어 화제를 모았다. 한때 오후 6시 이후까지 바둑이 끝나지 않으면 그가 반드시 이긴다고 하여 ‘안조영 타임’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하기야 타이틀을 여태 하나도 따보지 못한 사람치고는 닉네임이 많았다.

2003년부터 2006년이 밝을 때까지 무던히 기다렸다. 그 동안 국제대회다운 국제대회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채 국내기전 본선에만 줄기차게 올라갔다. 이런 진드기가 없었다. 입단 13년차가 되도록 늘 랭킹 10위권 이내에 들었던 안조영. 한번쯤 미끄러져 바닥을 헤매기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그는 숱한 실패에도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꾸준히 그 자리를 지켰다.


2006년 기성전 실패 후 또 다시 일어서다
하늘은 역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 4년 만에 기회가 온다. 진지함과 노력의 대명사 안조영이 2006년 초반 눈에 띄는 상승세를 보였다. 반면, 기성을 보유하고 있던 박영훈은 승률 30%대로 추락하여 슬럼프였다.

그토록 괴롭혔던 이창호도 아니고 박영훈이다. 만만찮은 후배이지만 이창호와 같은 절대패자다운 점은 없었으니 천우신조였다. 게다가 안조영은 오랜만에 출전했던 국제대회인 강원랜드배 한·중바둑대전에서 천야오에 왕시 뤄시허에게 3연승을 거두는 등 최고조의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급상승세를 보였던 그가 또 가로막혔다. 앞선 세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2006년 다시 호조로 돌아선 것은 끝없는 노력의 힘이었다.

그러나 역시 기성전에서 만난 박영훈은 이창호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투는 실력자다웠다. 이창호에 버금가는 계산력을 바탕에 밀려 중반 이후 계속 추월당하고 만 것이다.

충격이었다. 일단 패배를 안겨준 이가 일인자가 아니란 점에서 충격이고, 자신과 비슷한 후반능력을 자랑하는 후배라는 점에서도 충격이었다. “인연이 있어야 하나 봐요. 그 인연이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로부터 꼭 1년 만에 우연찮게 기회가 또 찾아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앞선 4번의 기회처럼 요란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유야무야, 오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나타났다. 그런데도 타이틀을 따냈다. 그에게 그토록 괴로움을 안겨주었던 이창호를 8강에서 보기 좋게 뉘고 말이다.


예산에서 서울로
오뚝이 안조영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예산기원’이 나온다. 충남 예산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기원이 하나 밖에 없다. 15년 전 쯤 그 허름한 예산기원에 눈매가 유난히 반짝거리던 소년이 있었다.

7급 정도의 기력이었던 부친의 손에 이끌려 우연히 들러본 기원. 아마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까. 급기야 그 소년은 동네고수들을 전부 다 ‘섭렵’하고는 예산최고수에 오른다. 여기까지는 동네 1급들에게 무진장 들었던 얘기이다. 그런데 운명처럼 그를 프로의 길로 이끈 인물이 있었다.

2003년이었나 보다. 당시 입단 10년차가 되었던 그가 마지막 신인으로서 신인왕을 차지했을 때이다. 치우쥔과의 한·중신인왕전 강원랜드대국 때, 낯선 분이 대국장 주변을 서성이다가 안조영과 반가운 해후를 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조영이를 보러 왔습니다.” 그는 예산시절 바둑선생님이었다.


▲ 한중 신인왕전에서 치우쥔과 대국중인 안조영(왼쪽). 안조영이 치우쥔에게 1승 2패를 거둬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그랬다. 안조영을 말할 때는 그 흔한 프로사범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왜, 누구누구의 문하, 이런 것 말이다. 지금은 공주산업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일연 씨(아마5단)였다. 십단을 따냈을 때 가장 먼저 기쁨의 축전을 보내온 은사였다.

동네기원의 작은 유망주에 불과할 수 있는 안조영을 큰 무대로 이끈 이교수였다. 당시 강만우 9단이 연구생 사범으로 있었던 한국기원을 찾아가서 사정사정한 후에 테스트 대국을 통해 연구생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그때가 89년. 안조영의 나이 초등3학년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다음 그는 프로에 입단한다.

과거 얘기를 하다 보니 안조영은 또 고마운 사람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것이다. 연구생 시절 강만우 정대상 9단에게 지도를 많이 받았다. 안조영은 지금도 고마워하는 부분이다. 당시 월사금도 없이 트레이닝 사범으로써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사범들이었다.

작은 아버지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생활 5년간 눈이 반짝이는 조카를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십단 안조영’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예산의 기원에서 싹을 키워주셨던 많은 이들….


▲ 첫 타이틀 획득! 원익배 십단전 결승 최종국, 안조영(왼쪽)과 백홍석이 대국 후 복기를 하고 있다.


느긋해진 것이 타이틀 획득의 비결
“앞으로는 제가 느는 속도보다 후배들이 더 빠를 것 같아요. 그래도 계속 다시 시작해야지요. 바둑이란 눈에 띄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기세나 노력 무심의 맘가짐 같은 무형의 능력도 배가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타이틀을 비로소 획득했다고 해서 더 거대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란다. 다만 프로기사로서 소정의 목표는 이루었기에 무척 기쁘다고 한다.

29세의 나이는 ‘더 이상’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프로는 계속 정진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에 노력파 안조영은 타이틀이라는 열매를 땄다. 4전5기가 아니라 14전15기라도 다시 일어설 안조영이다. 그 어느 해보다 이번 설이 기다려질 테다. 예산의 그리운 얼굴들을 뵐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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