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을 끄는 청년 백홍석이다. 결코 안조영보다 ‘예상득표’가 적지 않았던 강타자. 피차 뒤가 없는 막판 대국도 안조영이 초반부터 유리했다. 그러나 형세를 낙관한 탓인지 중반 들어서 백홍석의 추격이 빛을 발해, 이제는 누가 앞선다고 할 수 없는 상황. 좌변에서 백홍석이 실리를 탐하자, 대조영의 호령처럼 중앙 급소를 찔러간다. 순간, 파이터 백홍석의 얼굴은 홍조로 변색되어 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보통보다 낮은 높이에다 눈이 유독 빛나는 청년. 과묵함과 성실함이 브랜드인 청년 안조영이 마침내 한을 풀었다. 만만치 않은 맹장 이영구·이창호·송태곤·백홍석이 차례대로 그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그 중에서 8강전에서 이창호를 꺾은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작년 우승자 이창호는 입단 이후 안조영에게 통산 13승(1패)를 기록한 천적이었다. 상처로 남아있는 4개의 은메달 안조영은 79년생이다. 93년 14세의 나이로 입단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비교적 빠른 성장을 보여서 이창호 이후 세대 중에 크게 한몫을 할 줄 알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입단 3년 만에 삼성화재배에 오르며 이세돌·박영훈이 본격적인 등장 이전 이미 ‘황태자’로 인정받는다. 게다가 이듬해 신예프로10걸전에서 우승을 한다.
여기까지는 일류기사라면 누구나 걷는 ‘정규코스’이다. 이듬해인 98년에는 삼성화재배 LG배 등에 진출하더니 99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지금은 사라진 최고위전에서 철옹성 이창호에게 도전하게 된 것. 그의 나이 20세였다. 임전소감이 마르기도 전에 ‘어 어…’ 하다가 첫판을 놓치게 된다. 하필 도전기는 3번기였다. 일찌감치 막판에 몰려서 2국에서는 후회 없는 바둑을 두어보자고 다짐했으나 반집패였다. 하기야 그 당시는 이창호와 마샤오춘간의 한·중 헤게모니 싸움이 한창일 때였으니 그가 일인자를 넘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좋은 경험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때는 이창호를 이기리라고는 스스로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조훈현·유창혁·최명훈·이세돌 등 맹장을 제치고 도전자가 되었다는 자체로 만족했다. 2000년에 들어서도 LG배 후지쯔배 등 세계무대를 밟고 각종 국내기전에서 본선 물고기로 활약하면서 팔뚝을 키워갔다. 2002년 최강 이창호에게 두번 도전 실패 그러나 오히려 이창호는 ‘안조영 킬러’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야 만다. 패왕전에서 안조영은 3대0으로 완패한다. 8전8패. 또 다시 명인전에서도 2국까지 2연패, 상대전적 10전10패를 마크한다. 그가 성장하면 할수록 이창와의 간극은 벌어져만 갔던 것이다.
제 아무리 확고한 랭킹1위 이창호라지만, 안조영도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인고로 10전10패는 모욕이었다. 비슷한 기풍 탓이 컸다. 반집의 제왕이긴 하지만 ‘동급최강’ 이창호에겐 무용지물이었던 것. 10연패 끝에 1승을 기록한다. 어쨌든 세 번의 도전기에서 한판을 건진 것에 만족해야했다.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는다. 더욱 더 갈고 닦는다. 또 세어졌다. 당시 안조영은 10시간 가까이 가는 장기전은 거의 모두 승리하는 괴력을 선보이고 있어 화제를 모았다. 한때 오후 6시 이후까지 바둑이 끝나지 않으면 그가 반드시 이긴다고 하여 ‘안조영 타임’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하기야 타이틀을 여태 하나도 따보지 못한 사람치고는 닉네임이 많았다. 2003년부터 2006년이 밝을 때까지 무던히 기다렸다. 그 동안 국제대회다운 국제대회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채 국내기전 본선에만 줄기차게 올라갔다. 이런 진드기가 없었다. 입단 13년차가 되도록 늘 랭킹 10위권 이내에 들었던 안조영. 한번쯤 미끄러져 바닥을 헤매기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그는 숱한 실패에도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꾸준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역시 기성전에서 만난 박영훈은 이창호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투는 실력자다웠다. 이창호에 버금가는 계산력을 바탕에 밀려 중반 이후 계속 추월당하고 만 것이다. 충격이었다. 일단 패배를 안겨준 이가 일인자가 아니란 점에서 충격이고, 자신과 비슷한 후반능력을 자랑하는 후배라는 점에서도 충격이었다. “인연이 있어야 하나 봐요. 그 인연이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로부터 꼭 1년 만에 우연찮게 기회가 또 찾아왔던 것이다. 이번에는 앞선 4번의 기회처럼 요란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유야무야, 오는 둥 마는 둥 그렇게 나타났다. 그런데도 타이틀을 따냈다. 그에게 그토록 괴로움을 안겨주었던 이창호를 8강에서 보기 좋게 뉘고 말이다. 예산에서 서울로 7급 정도의 기력이었던 부친의 손에 이끌려 우연히 들러본 기원. 아마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까. 급기야 그 소년은 동네고수들을 전부 다 ‘섭렵’하고는 예산최고수에 오른다. 여기까지는 동네 1급들에게 무진장 들었던 얘기이다. 그런데 운명처럼 그를 프로의 길로 이끈 인물이 있었다. 2003년이었나 보다. 당시 입단 10년차가 되었던 그가 마지막 신인으로서 신인왕을 차지했을 때이다. 치우쥔과의 한·중신인왕전 강원랜드대국 때, 낯선 분이 대국장 주변을 서성이다가 안조영과 반가운 해후를 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조영이를 보러 왔습니다.” 그는 예산시절 바둑선생님이었다.
그랬다. 안조영을 말할 때는 그 흔한 프로사범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왜, 누구누구의 문하, 이런 것 말이다. 지금은 공주산업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일연 씨(아마5단)였다. 십단을 따냈을 때 가장 먼저 기쁨의 축전을 보내온 은사였다. 동네기원의 작은 유망주에 불과할 수 있는 안조영을 큰 무대로 이끈 이교수였다. 당시 강만우 9단이 연구생 사범으로 있었던 한국기원을 찾아가서 사정사정한 후에 테스트 대국을 통해 연구생에 억지로(?) 집어넣었다. 그때가 89년. 안조영의 나이 초등3학년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다음 그는 프로에 입단한다. 과거 얘기를 하다 보니 안조영은 또 고마운 사람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갈 것이다. 연구생 시절 강만우 정대상 9단에게 지도를 많이 받았다. 안조영은 지금도 고마워하는 부분이다. 당시 월사금도 없이 트레이닝 사범으로써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사범들이었다. 작은 아버지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어린 조카를 데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생활 5년간 눈이 반짝이는 조카를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십단 안조영’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예산의 기원에서 싹을 키워주셨던 많은 이들….
느긋해진 것이 타이틀 획득의 비결 29세의 나이는 ‘더 이상’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프로는 계속 정진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에 노력파 안조영은 타이틀이라는 열매를 땄다. 4전5기가 아니라 14전15기라도 다시 일어설 안조영이다. 그 어느 해보다 이번 설이 기다려질 테다. 예산의 그리운 얼굴들을 뵐 수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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