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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시평]

바둑의 출발을 찾아서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

이청 바둑사학자2007-02-26 10: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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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필자는 다시쓰는 바둑사라는 이름으로 월간 바둑, 바둑세계 등에 글을 써 왔다. 바둑시평을 통해서는 '은허갑골문으로 본 바둑'이란 글도 쓴바 있다. 필자의 견해는 다소 생경 하고 엉뚱한 어법으로 독자들에게 읽힐 것이다. 기왕의 바둑사와 간격이 멀고 색감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다고 본다.

필자는 바둑 사학이란 어법으로 바둑사를 쓰면서 고통이 많다. 그러나 전공을 내 세우는 세상의 풍토와 자신들은 신경 쓰지 않으면서 타인의 의견은 무조건 내 치고 보는 전문가의 세계를 침범(?)한 죄라 생각하면 아쉬워 할 일도 아니다.

필자는 바둑에 관심이 많다. 물론 바둑을 잘 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바둑을 즐기고 사랑한다고는 말 할 수 있다. 평소 호기심과 연구심이 있기에 좋아 하는 바둑의 과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함이 있었다. 그래서 한중일 삼국에 나와 있는 모든 바둑사(史)를 찾아 읽었다.그러나 그 바둑사들은 도무지 두서가 없고 이론적이지도 못해 바둑에 대한 궁금점을 풀 수가 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필자는 이때 부터 역사 학자들을 찾아 나섯다. 역사학계에서 바둑은 그야말로 변방중의 변방이었다. 민속과 무속 하다못해 시골 구석의 장승에 대한 수많은 논문이 나와 있음에도 한국사에 차고 넘치도록 많은 바둑에 대한 전문 논문 한편 없다는 것이 경악했다(최근 명지대를 중심으로 여러편의 논문이 나온바 있다). 필자는 몇년전 부산에서 있었던 부경 교류전에 참석 한 적이 있었다.

부산에서 필자는 이수명, 이철승님 같은 열열한 바둑인을 만나고 놀랐다. 그저 바둑이 좋아 많은 경비와 열정을 바둑에 쏟는 모습이 경외스러웠다. 그들은 바둑이라는 한 공간안에서 모든 것을 열어 놓고 있었다. 부경 교류전이 끝나고 뒤풀이의 장에서 바둑사가 화제에 올랐다. 국내에 제대로된 바둑사가 필요 하다는 의견을 말 하자 "당신은 무엇을 하나? 당신이 해 봐라."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그랬다. 필자의 한국 바둑사 탐구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시간 저편에 있는 것들
한·중·일의 모든 바둑 고기록의 원문을 찾았다. 25사와 일본서기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등을 뒤졌다. 그 과정에 화랑세기와 조선왕조실록에 3백여건의 바둑 기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에도 바둑의 기록이 있었다. 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보고서인 관서평란록과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에 조선의 어린이 바둑 대회가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뿐이랴, 무당들의 설외설경속에도 바둑은 있었다. 놀랍고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한국 바둑사는 이제부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희망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 모든 자료를 바둑사에 관심을 갖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필자는 얼마전에 신라의 바둑(바둑세계 1월, 2월호 참고)을 쓰기 위해 김해에 간적이 있다. 필자는 김해의 한 박물관에 있는 한 와호(瓦壺)를 보고 그 앞에서 한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주에서 본 한반도 최고의 바둑 유물인 황남대총 남분 출토 바둑알(5세기)을 친견하고 온 뒤라 감흥이 더 했다. 5세기 출토 유물인 가야의 와호의 문양에서 바둑판 문양이 선명했던 탓이다.











◀ 그림으로 보는 자료-1
가야시대 와호 문형.

물론 와호의 몸에있는 문양이 바둑판의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대의 유물속에 이토록 정교하고 선명한 바둑판의 문양을 만난다는 것은 반갑고 기뻤다. 필자는 이 문양을 보고 울산에 있는 천전리 암각화를 떠올렸다. 두 해전 천전리를 가 본적이 있다. 필자는 천전리 암각화의 탁본에서 바둑판 문양을 보았었다.








◀ 그림으로 보는 자료-2
천전리암각화 부분도.

천전리 암각화는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에 그려진 것이란 학계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유물이다. 기하학적 무늬가 주변의 명문과 연관(황수영, 문형대), 영혼을 실어 나르는 배와 연관(임세권)등이 청동기시대의 농경과 연관이 있지 않는냐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바둑판 무늬의 이 기하학적 무늬는 가로, 세로 8줄을 넘지 않는 것이나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판 모양의 무늬임은 분명해 보였다.

무늬 아래에는 한 아이가 동물을 한마리 데리고 지나가는 모습이다. 아이가 아니고 임신을 한 여자를 그린 것이란 말도 있다. 이 천전리에서 멀지 않은 영일군 칠포리에는 암각지석묘가 있는데 그 위에 윷판이 새겨져 있다.











◀ 그림으로 보는 자료-3
칠포리 윷판형 암각.

윷이 부여에서 나와 한반도로 들어온 경로를 생각하면 이 윷판형 문양이 온전한 윷판은 아닐것이다. 별자리를 상징한 천문 기록이란 역사 학계의 의견을 존중 하면서도 바둑이 윷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온 단초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고대의 윷판형 무늬는 칠포리, 구룡포, 안동 수곡리, 익산 미륵산등 10여곳이 더 있다. 필자는 윷과 바둑의 연관을 부여의 바둑(바둑세계 3월호)이란 글로 자세하게 다툴 예정이다.

고대 암각화 속의 바둑 문양과 윷판 문양을 살피던 필자는 경주 석장대 암각화 앞에서 온몸이 얼어 붙는 순간을 맞았다.













◀ 그림으로 보는 자료-4
경주 석장대 암각화 부분도.

석장대 암각화는 1994년 동국대 경주 캠퍼스 고고미술학과에서 발굴한 유물로 가로 세로 900 x 170쎈치의 바위에 검파형 암각화 8점, 석검, 석청, 문양의 그림 11점, 배 그림 1점등과 해석이 불분명한 인물상등에서 필자의 눈에는 영낙없이 한 사람이 바둑판을 놓고 그 위에 바둑알을 어지럽게 늘어 놓고 고민(?)하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

바둑이나 고누나 장기등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반상 게임이나 무당이 판위에 점을 치는 모습이여도 무방하다. 이 그림을 이런 것과 연관 시키는 것이 견강부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다시 쓴 한국 바둑사라는 이름 안에서는 이 모든 기록을 의미 심장 하게 받아 들이고 고민할 수 밖에 없없다. 이 암각화에 대한 조금 더 진일보한 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기다릴 뿐이다.

필자는 경주를 떠나 오면서 단양 사인암을 거쳐 왔다. 고려 사람 우탁(禹倬)이 바둑을 두었다는 사인암 석국(石局)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인암 석국이 고려 시대의 바둑판이 되기 위해서는 우탁과 바둑의 연관성이 증명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본 고려사 열전의 우탁은 바둑과는 관련이 없었다. 우탁은 주역을 잘 이해하고 점을 잘 친 관원이었다(어떤 학자는 고려사에서 우탁이 바둑을 잘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한국 바둑사는 이런점이 문제다. 고대의 어떤 징후를 바둑사로 견인해 올 능력이 부족하고 기왕의 바둑사는 우탁의 기록처럼 헛점 투성이다. 우탁의 사인암 석국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우탁과 바둑의 관계를 증명 할 수 잇는 문헌이 확보 되어야 함에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바둑사는 지금부터라는 희망앞에 실망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구는 항상 과오와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필자 또한 그 과오와 실수를 거듭 하고 있다. 하여 이 과오와 실수의 현장에 멋지고 완벽한 바둑사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바로 그 사람을 기다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 이청의 한국 바둑사(바둑세계)가 인터넷에 서비스 되고 있습니다. 참고를 하면 좋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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