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최강은 누구일까?’ 동서고금을 통해 바둑 팬들이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문제이리라. 한중일은 오랫동안 자국의 리그만을 고집하였기에 상당 기간 동안 그 명제에 누구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88년, 급기야 전 세계 바둑 팬을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빅이벤트 후지쯔배가 출현한다. 후지쯔배가 출범한 지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하니 후지쯔배는 세계바둑사의 역사로써 손색이 없다. 개혁과 개방이 화두로 오르내리던 시절. 한국으로서는 당시 일본의 톱클래스와 겨룬다든지, 비 수교국이었던 ‘중공’과 겨룬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공식대회에서 중국 일본 기사를 만난 것은 후지쯔배가 처음이었다. ‘세계’라는 글을 앞에 붙이고 전 세계 바둑인들을 한데 모이게 한 효시가 후지쯔배이다.
87년 8월 대만에서 날아온 소식에 전 세계 바둑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잉씨배는 전 세계 16명의 바둑고수를 불러 88년도에 결전을 치르겠다고 밝혔기 때문. ‘잉창기기금’은 미화 100만 달러를 쾌척하고 우승상금 40만 달러의 초호화 바둑대회 개최를 발표했다. 바둑을 발명한 중국인이 세계대회를 주최해야 의미가 있다고도 덧이면서. 우승상금 40만 달러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당시는 최고상금은 일본 기성전으로 우승상금이 2600만 엔(당시 한화로 1억5000만 원 정도)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단일대회 우승상금으로 40만 달러(당시 한화로 3억3000만원, 일화로 4천600만 엔)라면 세계 바둑계에서는 놀라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일본 바둑계는 서둘러 후지쯔배 개최를 결정했다. 현대바둑의 꽃을 피웠다고 자부하고 있으며, 세계 속의 일본바둑을 심고 있고, 기량으로도 최고를 자랑하고, 더욱이 경제력이 있는 일본으로서는 절대 대만이 앞서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후지쯔배는 급조된 ‘칠삭둥이’였다.
후지쯔배는 세계바둑시장의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88년 국내 바둑계에서는 5백만 바둑 팬이 있었다. 일본과 중국은 1천만 팬.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한국은 1천만을 상회하는 바둑 팬을 거느리고 있고 중국은 3천만을 훌쩍 넘긴다. 또한 대회 상금이 대폭 상향 조정되었다. 당시 국내 기전의 1위부터 3위까지의 우승상금은 왕위전 1천6백만원, 기왕전 1천2백9십만원, 명인전 1천5십만원이었다. 그야 말로 도토리 키재기. 지금은 강원랜드배가 1억원이요 전자랜드배가 5천만원이다. 또한 바둑리그는 딱히 우승자 1명에게 지급되는 돈은 아니지만 3십억원짜리 매머드 기전이다. 제한시간이 무척 짧아진 것도 후지쯔배의 영향이다. 그 이후로 생기는 기전마저도 전부 제한시간 3시간짜리의 세계대회로 만들었으니 새 기전의 모델이 바로 후지쯔배였다. 당시엔 일본과 한국에서도 5시간 6시간짜리 바둑이 수두룩하던 시기였기에 제한시간을 줄이는데도 엄청난 기여를 한 셈. 그러나 창설 당시는 어마어마했던 상금이 아직까지 제자리걸음인 것은 불만 사항이다. 후지쯔배는 20년 전 우승상금이 1천5백만 엔이었으나 지금도 그대로이다. 물론 대회중간에 2천만 엔으로 인상했다가 16회 대회부터 1천 5백만 엔으로 원위치시켰다. 그 이유는 일반의 생각같이 일본이 우승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후원사의 재정문제 때문.
초창기 후지쯔배의 기억 2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은 어디까지나 ‘느낌’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막상 후지쯔배를 치르다보니 그 예상은 큰 범주에서는 맞았으나 우승자의 면면은 예상외였다. 1·2회 때 우승자 다케미야는 조치훈·고바야시 등에 밀려 일본 내에서도 혁혁한 실력자가 아닌 기사. 또한 1·2회 대회 준우승에 그치다 3회 때 우승을 차지하는 린하이펑도 초절정고수가 아니다. 그는 “향후 세계대회가 생겨날 것을 대비해 3시간 짜리 속기를 연구하고 있었다.”며 ‘준비된 승자’임을 알리기도 했다. 첫 출전 한국대표 3인 첫판 탈락 일본이 자국기사로 묶어 둘려는 욕심 탓에 한국의 조치훈이나 대만의 린하이펑 등을 일본기원소속으로 출전하는 것은 팬으로서는 의아한 결정이었다. 중국과 대만의 불편한 양안관계 탓이었다. 졸지에 강타자 조치훈을 ‘앗긴’ 한국이지만, 세계최강자를 가리고자 하는 대회 취지에 드넓은 마음으로 동참한다. 동양증권배가 실질적인 세계대회의 격식을 갖추는 시기까지는 ‘숟가락만 들고’ 일본이 차려준 밥상으로 뛰어드는 형국이었으니까. 2회 대회는 24강전으로 확대되어 치러진다. 1회 대회와는 달리 조훈현·서봉수가 동반 4강에 합류했으나 나란히 역전패. 이창호도 처녀 출전했으나 왕밍완에게 패해 탈락했다. 조훈현의 잉씨배 우승 이후에도 한국의 후지쯔봉 등정은 쉽지 않았다. 무려 5년 동안 결승무대에 한 번도 올라가지 못한 채 정상 9부 능선에서 맴돌 뿐이었다. 후지쯔배의 이변들
4회 대회에는 세계대회 사상 처음으로 기권패가 일어난다. 중국의 실력자 치엔위핑과 조치훈은 결승에 진출했다. 그런데 치엔위핑은 평소 지병이던 정신질환으로 인해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결승전을 치를 수 없었다. 조치훈의 기권승. 또한 결승전과 함께 치러지기로 되어있었던 3~4위전도 고바야시가 피곤함을 이유로 왕리청과의 대국을 기권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미 두달 전 동양증권배를 우승한 이창호가 철저한 무명기사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이창호에겐 처음 대하는 상대에겐 맥을 못 춘다느니, 물 징크스가 있다는 얘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택무는 이창호를 이긴 후 지금은 바둑을 두는 지 안 두는 지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기사이니. 한국기사에겐 등정을 허락하지 않던 후지쯔봉이 바로 비경을 드러내었다. 93년 6회 대회에서는 그간의 설움을 토하듯 조훈현과 유창혁이 나란히 결승까지 올라가서 대 난전을 벌여 유창혁이 우승. 두 사람은 이듬해에도 또 결승까지 올라가서 이번엔 조훈현이 우승을 차지한다. 93년은 한국바둑은 진로배·잉씨배·동양증권배·후지쯔배를 싹쓸이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제20회 후지쯔배가 14,16일 본선 1,2회전을 펼친다. 한국으로서는 후지쯔배 10연패를 달성할 수 있을 지 관심거리이다. 일단 출전 멤버로 보면 최강이 출전했다. 작년 우승자인 박정상을 위시해 이세돌·이창호·박영훈·최철한·조한승·고근태가 참가한다. 랭킹 1위~7위 기사가 ‘후지쯔봉 정벌’에 나선 셈.
중국이 가만 두고 볼 지 여부도 관심이다. 중국은 올 들어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을 정도로 상승국면이다. 창하오(삼성화재배)·구리(춘란배)를 필두로 쿵제·후야오위·왕시·저우허양 등 내로라하는 6명의 기사가 출전한다. 다만 한국일류들에게 강세를 띄는 씨에허가 불참한 것이 위안거리. 일본은 7명이 출전한다. 야마시타게이고·장쉬·다카오신지 등 ‘신3인방’에다 유키사토시·요시다시게야키·나카무라신야. 그리고 국제전의 백전노장 요다노리모토가 출전한다. 대만은 LG배 우승자 저우쥔쉰이 많은 카메라 플래시를 받을 것으로 보이고, 유럽은 쉭쉬나 스베틀라나(스베타), 북미는 리지에, 남미는 페르난도 아길라 등이 ‘파란 눈의 기적’을 꿈꾼다. 약관 20세를 맞이한 후지쯔배. 일본이 최근 들어 우승과는 거리가 먼 전력이다. 또한 자국 바둑열기가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식어있다. 그러나 꿋꿋하게 대회를 주최하는 대승적인 일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한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력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콘크리트처럼 이제는 새로운 20년이 더해지는 불혹을 향해 나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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