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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만나봅시다 1. 서봉수 9단

진재호 바둑평론가2007-05-17 18: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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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입의 한국바둑계는 왕조구분이 확실치 않았다. 2세대 김인이 조금 앞서나갔지만 여전히 1세대 조남철이 강미를 띄고 있었고 강철민 윤기현 등이 호시탐탐하였다. 3세대 대표주자가 될 조훈현은 일본에서 승승장구, 언제 꽃망울을 터뜨릴지 관심이었다.

1972년 한국바둑계는 때 아닌 쓰나미를 만나게 된다. 투박한 말투에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척박한 땅처럼 깡마른 사나이. 청년 서봉수가 느닷없이 명인에 오른다. 서봉수는 14세에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워 4년 만에 입단하고 그 이듬해 명인에 오르는 만화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바둑은 반항적이었고 거칠었고 집요했다. 그 투박함을 무기로 93년 응씨배를 우승하며 인생 절정기를 맛보았고 마침내 97년 진로배 9연승 신화도 창조했다. 덕분에 적당한 부와 엄청난 명예는 그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부러울 것 없던 그가 나이 50줄에 들어서 뜻하지 않는 추락을 거듭한다.

20년을 넘게 이어온 가족과의 이별. 그리고 젊은 베트남 여성과의 재혼. 자신이 일찍이 설파했던가. “인생 40 이후부터 리바이벌이다”라고. 인생 후반기의 파란만장한 반외(盤外)의 풍광은 그를 힘들게 했다. 요즘은 바둑소식에도 등장하지 않아 무척 궁금한 차에 그를 찾았다.

제2의 인생 출발 지하철 4호선 평촌역에서 서명인을 만나기로 했다. 몇 번 출구로 나오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출구가 하나밖에 없단다. 막상 역에 당도하자 출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서명인이 제대로 답해 줄 리가 있나.’ 어느 곳으로 나갈지를 망설이다 왼쪽을 택했다. 서명인은 출구번호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골치 아프다고 여기는 쪽이니까.


“뭐 드실래요? 중국집 빼고….”
‘아, 중국집…자장면?’ 어린 시절 먹어보던 자장면의 향수를 잊지 못해 서명인은 나이 50이 넘겨서도 자장면을 좋아한다. “자장면? 냄새가 맛있잖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지.”
바둑가에 살면서 그와 같이 자장면을 먹어보지 못했다면 서명인과의 친소관계가 불확실한 사람이리라. 서명인은 자신이 자장면을 좋아하니 상대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 순수한 사람이다.

회광반조는 아직 유효한 얘기? 복 집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실내가 덥다며 에어컨을 켜달라고 한다. 에어컨이 찬바람을 토해내자 슬슬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년 삼성화재배가 첫 소재로 물꼬가 트인다. (타이젬 이정환 기자/하영훈 부장 배석)

“서명인님, 제가 4강까지 간다고 했잖아요?”(하부장)
“그랬지. 귀신이네.”
“에이,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 이왕 한 장 쓸 거면 우승한다고 예언을 해야지.”(필자)
“이창호가 우승할 줄 알았는데 창하오가 날이 섰나 봐…”
“회광반조가 조금 약하지 않았나 싶은데…”(이기자)

서명인은 원래 외향적이지 못해서 말도 자주 더듬고 숫기가 없는 편이다. 특히 모르는 사람이 합석하면 더욱 그러하다. 한마디를 들을라치면 몇 번씩 끊어져 듣는 사람이 상당히 인내해야하는 타입이다. 그러나 55세 서명인은 완전히 달리진 모습이다.

“(바둑에 대한) 열정만큼은 아직 빠지진 않지. 승부란 늘 새로 시작하는 것 이니까…” 나이를 먹어서도 바둑 수가 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서명인. 그는 일반론을 들먹였지만 자신이 늘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요즘 화두는 건강 “의사를 찾아가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는데, 나는 내 몸이 상당히 안 좋거든. 10년 전에 자다가 죽을 정도로 기침을 심하게 해서 그 다음날 담배를 딱 끊었지. 아니면 내가 겁이 많아서…”

“젊은 때 몸을 함부로 놀린 사람이니 자업자득이지.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한 번 기회는 오지 않을까. 남들이 들으면 웃겠지? 하하.” 최근의 화두는 건강이란다. 그리고 삼성화재배를 다시 한 번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그 이름은 서봉수 2차로 조용한 카페로 갔다. 서명인은 언제부터인가 조용한 곳이 좋단다. 선술집 같은 곳은 간혹 떠들어대는 것이 싫단다. 카페에 들어서자 종업원 아가씨가 대뜸 그를 알아본다. “아직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쑥스럽게 시리…” 싫지 않은 표정이다. 앉자마자 아가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서명인의 팬이라며 휴대폰을 들이 민다.

TV출연을 하게 되면서 몇 번씩이나 부조정실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을 비추는 화면을 유심히 체크하는 서명인. 자신의 목소리와 모습이 너무 늙어 보인다며 걱정이 많다. 자신이 출연하고 나서 팬들의 출연독촉이 이어진다고 하자, 요즘은 더더욱 흰 머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고 그와 함께 열광했던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성적이 예전만 못해도 팬들의 사랑은 영원하다. 팬 없는 서명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머리가 벗겨지는 것을 의식하는 나이가 되었음일까? 확실히 예전보다 팬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결국 카페 종업원과 사진 촬영에 흔쾌히 응한다.

아내 자랑은 팔불출인데… 홀몸이던 서명인이 29살 연하의 베트남 아가씨와 재혼한 지 벌써 2년 반이 흘렀다. 당연히 우리들과의 미팅에서도 화제가 된다. “나 하나만 믿고 머나먼 이국땅에 온 여자인데, 앞으로 바둑을 열심히 두고 돈도 많이 벌겠다.” 그의 일관된 다짐이란다.

아직 따른 술도 한잔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척척 얘기를 쏟아낸다. “라면은 스프를 빼고 양파 당근 등으로 국물을 내는 베트남식 국수지. 고기볶음은 특이한 양념이 들어가서 제법 이국적이야. 그래도 그 친구는 매운 한국음식을 좋아하지. 고추장을 잘 먹어.”

고추장바둑이라는 서봉수의 별명을 알고 있는 듯?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는다. 서명인은 신이 났다.

“자부심이 대단한 친구지. 적극성과 애교도 있고…” 그 친구라는 호칭이 참으로 정겹다. 이 친구도 아닌 그 친구. 조금은 떨어뜨려놓고서 서로 지킬 것은 지키는 관계라는 의미 아닐까.

그 친구가 한국말 잘해! 베트남 말은 아직도 자신은 못한단다. 남들도 그 정도 살았으면 조금은 할 텐데, 무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남에게 보여줄 정도가 안 되면 못한다고 말하는 비관파가 아니던가. 물음과 관계는 없이 아직도 부인 자랑이 끝나지 않았나 보다.

“그 친구는 컴퓨터를 배워서 영화를 즐겨본다. 중국영화를 주로 보더라고. 한국영화도 있어. 집안에서 한류의 힘을 느끼고 살지.”
“그럼 어떻게 소통해요?”
“얼굴보고 있으면 되지, 소통은 무슨…(뜸 들인 다음) 그 친구가 한국말 잘해!”

베트남 바둑대회 3월인가, 결혼 후 처음으로 베트남 방문을 했을 때 얘기가 궁금했다.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전국대회를 개최했다고. “바둑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바둑계를 위해 조금이나마 되돌려주는 것이지. 요즘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잖아. 동남아, 특히 그 친구의 나라에서 바둑 붐을 일으키는 것도 소중하지. 또 그곳에는 한류가 엄청나니까.”

“그 친구가 결혼 전에 한 부탁도 있고 해서 베트남을 택했지. 내년에도 대회를 치를 거야. 이미 예산도 마련이 되어 있어. 아직은 후원해주는 분의 이름을 밝히기는 좀 그렇고…점차 참가선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봐. 뭐 조남철 선생이 바둑을 개척할 때 그 심정이랄까. 하하하.”

2세 계획은? 예민한 문제라서 물어보기가 민망했는데, 서명인은 의외로 생각해 놓은 듯 거침없었다. “아까 말했잖아. 일단은 건강을 되찾고 돈이 모이면 자식도 입양할 계획이야. 그 친구도 흔쾌히 승낙했어. 나와 결혼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게끔….”

바둑리그에서 아깝게 탈락했는데… “왜, 안 아쉽겠어? 한 끗발 차이로 떨어졌는데… 복이지 뭐.” 8개 팀의 선수 6명, 감독 1명 등 총56명이 출전하는 한국바둑리그. 참가 자체가 타이틀획득과 비슷하다고 할 만큼 프로들의 선망의 기전이다. 랭킹28위까지 이내의 기사는 자동 선발, 예선에서 12명을 선발, 각 팀이 와일드카드로 8명을 또 선발한다.

“와일드카드로 뽑히는 수는 있었겠지. 그러나 승부가 되다 보니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나봐. 밖에서 보는 눈이 더 정확할지 모르지. 내가 팀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야. 더군다나 속기전이잖아. 감독이라면 나를 뽑아줄려나? 하하하.”

속기 프로를 광대로 만든다. “84년도인가, 동시에 속기타이틀을 2개를 보유한 적도 있었지. 젊을 때야… 비슷한 실력이라면 아무래도 나이 든 쪽이 속기에서는 불리하게 되어 있어. (나이 들어도) 연습해야지. 언제나 시대에 맞춰나가야 하거든. 그런데 그게 귀찮지.”

“바둑TV에도 자주 나가서 실전감각을 익혀야 해. 속기로 두는 시합 말이야. 여자기사랑 두게 되어 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지지옥션배를 지칭). 망신만 당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속기는 프로를 광대로 만들어.”

서명인은 한동안 기사실의 ‘룸펜’의 대표주자로서 바둑이나 노름 등 자신이 ‘정통한’ 분야에서는 120% 통째로 쏟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정열적이었다. 아는 것을 숨기고 사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인 지 모른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일 것이다. 속기는 프로를 광대로 만든다? 준비된 독설가답다.



투박하고 거친 조선 백자
인간 서봉수에게 열광하는 팬이 많음은 그가 가진 역동성 때문이 아닐까. 근성과 배짱 고집으로 똘똘 뭉쳐진 바둑.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절대자에게 도전하는 그의 인생은 언제나 도전으로 점철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전히 한국에서 스스로 바둑공부를 한 독학파 서봉수는 거친 맨 주먹으로 변변한 정석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그가 그토록 몽매했던 일인자를 향한 끝임 없는 도전이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조훈현이 세련된 화려한 고려청자였다면 우리네 민초와 같은 투박하고 거친 서봉수는 조선백자라는 매력이 있다.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악어처럼
경계를 게을리 하는 순간 느닷없이 달려들던 93년 싱가폴에서 봤던 악어를 기억할 것이다. 자신의 몸을 한없이 낮추며 낚아 챌 기회를 엿보며 인내하던 악어. 살아남기 위해 낮은 포복고행을 통해 부동심을 얻는 깨달음을 서봉수에게 주었던 그 악어.

지천명의 서봉수는 외면은 전혀 각이 져 있지 않다.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이웃집 아저씨이다. 작은 것에도 행복할 줄 아는 참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아직도 식지 않은 열기를 머금고 있는 휴화산이다. 홍시처럼 붉어지는 그 얼굴을 보면서, ‘뉴명인’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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