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문인겸 화가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강세황(1713-1791)이다. 강세황은 병조참의 한성부윤을 지낸 관료 출신으로 '문자향서기권'을 강조하던 당대의 예술계의 독보적 존재였다. 강세황은 선대 강백년, 강현 3대가 기로소(耆老所)에 든 집안의 인물로 각종 기행문과 사실적 그림을 남기며 시서화 삼절(三節)로 부리던 예원(藝院)의 총수였다. 이런 강세황(아래 오른쪽 사진)이 남긴 그림 중에 1747년 6월 1일의 기연(碁宴)이 있어 바둑인들의 관심을 끈다. 기연은 바둑을 두기 위해 모인 동호회의 모임쯤 된다. 강세황이 그린 바둑을 두는 사람들과 그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고 유경종(柳慶種)이 쓴 화재가 재미있다.
이글은 강세황의 그림 밑에 유경종이 쓴 글이다. 그들은 친구 사이로 복날을 맞아 유경종의 별장에 모여 개를 잡아 안주를 만들어 놓고 바둑을 두며 하루를 즐기는 중이다. 바둑을 두는 모습이 갓과 버선까지 벗었(洗足者爲)다고 하니 무척이나 편한 자리다. 지루한 장마도 끝나고 마침 매미가 처음 나와 울기까지 하여 청량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다. 자리를 빛나게 하기위해 불러온 악사가 거문고를 뜯으니 그음을 따라 사람들이 흥얼거리고 어떤 이는 시(詩)를 읇조린다니 선계가 따로 없다. 거기에다 삶은 개고기에 따끈한 술 한잔까지 있으니^^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랴. 철학과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바둑과 음악 그리고 시와 술이 있으니 그야말로 자족(自足)이다. 이 장면을 추억하고자 당대의 화가 강세황이 그림을 그리고 유경종이 사실(事實)로 설명하고 있다. 강세황은 자신의 문집속에 바둑은 잘 모른다고 한 바있다(手不粘碁子黑白). 강세황은 이날 기연에 참석한 사람중에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강세황은 이 모임에 참석을 했고 기꺼히 기회도를 그린다. 강세황이 자신의 말대로 바둑은 잘 몰랐다 하나 음악과 술 그리고 개고기의 포식(包食)의 즐거움가지 모른것은 아니다. 강세황은 이날 흥에 겨워, 초복 오늘을 자세하게 그리노니/ 돌려보며 자랑하세/ 라는 시를 남긴다. 초복날 기연(碁宴)이 벌어지던 시대 사람 이덕무(1741-1793)는 사대부들이 밤낮으로 바둑을 두며 가산을 탕진하고 생업을 망치고(傾家産廢恒業者有之)있다고 했다. 이덕무의 이말은 유경종의 별장에서 벌이고 있는 이런 모임을 꼬집는 말이다. 그러나 당대의 문원의 중심에는 바둑과 거문고 그리고 시(詩)와 술(酒)이라는 풍류가 절대적이었다. 김홍도(1745-?)가 이름은 있으나 배경이 부실(?)한 '장혼'의 모임을 따라가 그림을 그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말이 나왔으니 김홍도는 강세황의 제자다. 김홍도는 7살 되던해 강세황의 집으로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내제자인 셈이다. 김홍도는 바둑을 그린 그림 몇 점을 남기고 있다. 백학관기에 김홍도의 친필 화재가 있는데 내용은 별게 아니다. 소동파가 바둑을 잘 몰랐다/ 백학관에서 하루 유숙을 했는데/ 책을 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소나무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 사이로 바둑 두는 소리 청아하여/ 이거다싶어 바둑을 배우려 했으나 끝내 배우지 못했다/ 김홍도는 바둑은 잘 알지 못했다. 그점은 스승과 닮았다. 그러나 그들 사제는 여러 점의 바둑도를 남겨 당시대의 유행과 풍류에서 비켜 서 있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잘 할줄 안다하여 취미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권상신(1759-1825)은 논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일년 중에 놀아서 안되는 날이 어디 있나/ 한세상을 살며 함께 놀아 안될 사람도 따로 없다/ 그러나 좋은날 더욱 좋은 사람 만나/ 한때를 보낸다면 더욱 좋은거 아니랴/ 조선의 지식인들은 운치가 있다. 그들의 세계에는 언제나 바둑이 있었다. 시를 짓고 술 마시고 음악을 즐기면서 거기다 바둑까지 매치를 시켜야 진정한 운치라 여겼다. 1747년 안산에서 있었던 기연(碁宴)이 눈에 선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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