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천 복사골의 J원장(박지은의 스승)과 함께 한국기원 기사실에 나란히 앉아서 기보를 놓아보던 소녀가 있었다. ‘선머슴아’처럼 머리도 짧았고 자그마한 몸매지만 빈틈없이 당차게 보였다. 박지은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입단하기 이전이니까 10년쯤은 족히 되었을 것 같다. J원장도 필자와는 대학시절에 만났던 귀한 인연이지만, 그가 키우는 한 소녀의 재주가 워낙 특출하다며 자랑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J원장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제자가 ‘연구생 1조’임을 자랑해서 이전부터 한번 쯤 만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그 유명한 제자를 보자마자 필자는 의자를 슬그머니 당겼다. “2점은 놓아야 할 거요.” 첫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낀 백돌이 유난히 커보였던 그녀와 신나게 출발했던 바둑. 그러나 그녀는 100수 언저리도 채 못 되어서 바둑은 말이 안 되게 만들어 버린다. 필자는 혹시 누가 구경하러 들어올까 봐서 재빨리 돌을 걷고 말았다. 치수가 맞지 않았다. 지난 주 원양부동산배 결승에 진출하여 대리배에 이어 연속으로 세계대회를 석권할 준비를 하고 있는 10년 후의 당찬 그녀. 한국 여자기사로는 최초로 입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전사’ 박지은을 만났다. 1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소원은? 그럼 잘 먹어야하는데, 치킨 2마리를 다 해치우던 먹성은 어디 갔나? 10년 전 추억을 들추자, 아쉽게도 한국기원 앞에서 치킨을 두 마리나 사주었던 나의 선행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 반응에 필자가 아쉬워하자 미안했던지 서둘러 수습한다. “누군가 사주시긴 했는데…” ‘연구생 1조’ 출신인데, 당시 여류입단대회가 없었더라도 입단할 수 있었을까? 박지은을 얘기하자면 자연스레 10년 전 연구생시절을 얘기해야 한다. 당시 박지은의 기력은 연구생 1조였다. 여자연구생 중에서가 아니라 남자와 같이 겨루었던 연구생들 말이다. 한 번쯤 1조에 오른 것이 아니라 3~4개월 동안 5할 승부를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여자입단대회를 통해 입단했다. 그 무렵 강세를 나타내던 여자연구생 권효진이 연구생 2조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지은이 남자연구생과 겨루어서 입단할 가능성은 30%쯤 되었을 것이라고 당시의 연구생사범이었던 강만우사범의 전언. 힘들게 결승까지 치른 대리배 우승상금이 최근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상금은 어디에 썼나?
이번에 원양부동산배에서 결승에 진출했는데, 쾌속 행진하는 이유는? 자신이 여자 강자라는 생각 때문에 상대가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을 재차 강조했다. 비근한 예로, 이창호가 앞에 앉으면 상대들은 일단 주눅이 들어 시작을 하게 된 것과 매한가지다. 강자의 프리미엄 같은 것이다. 박지은도 남들이 주목하는 무대 가운데에 서면 ‘파르르’ 입술을 떨던 기억이 있다. 지금 같은 강심장으로 거듭난 것도 다 ‘경험’ 탓이리라. 루이를 꺾어야 진정한 일인자가 된다는 주장에 대해선? 싫은 얘기 하나. 조혜연과의 경쟁이 재미있는데? 조혜연과 박지은은 나란히 97년 입단한 이후 중요한 대국에서 자주 만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다. 두 사람이 최근 만난 것은 삼성화재배 예선 결승으로 이 대결에서도 조혜연이 박지은을 꺾었다. 사람들은 라이벌이라고 부르지만 적어도 박지은에게는 천적과 같은 조혜연이다. 역대전적에서 11승2패로 조혜연이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 내년 1월 한국최초의 여자 입신 여부가 관심인데? ‘여자 유창혁’이라는 별명도 있고, ‘살쾡이과’라고 칭하면 듣기 싫은가? 고양이를 좋아한단다. 개는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이 싫다고 한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언제든 자립하고자 궁리하는 고양이가 맘에 든단다. 다분히 ‘여전사’ 박지은에게는 개보다는 고양이가 어울릴 테다. ‘아저씨! 돌을 거두시지요?’라고 말하듯 필자를 바라보는 자신만만한 눈길이었다. 그 눈길이 10년 후에도 가끔 TV화면에 등장하곤 한다. 그것까지도 유창혁을 꼭 닮았을까. 필자가 보기엔 꾸준함이 부족한 문제도 있지만 큰 판에는 잘 이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박지은은 2003년 4명을 선발하는 신라면배에서도 한국대표로 선발되었고, 천하의 조훈현에게 2전2승을 거둔 바 있는 강타자. 지난 여름에 지지옥션배에서 6연승을 기록 중이던 조훈현을 격침시키던 모습이 기억날 것이다. 세인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는 굵직한 시합들을 박지은은 많이도 이겼다. “이창호와의 대국이 없어 아쉽다” 인터넷 검색창에 박지은이라고 치면 골프선수 박지은이 등장한다. 물론 골프 박지은이 바둑 박지은보다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력대비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 속에서 비교우위 유명세를 띄는 것이리라. 박지은이 2회 연속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5세가 되는 내년 1월 한국 최초의 여자 9단이 되는 날을 상상해 본다. “바둑 둘 때만은 여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보호받고 좀 못해도 인정받는 것은 승부세계에서 맞지 않는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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