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중계 뉴스 기보 상점 새소식

[기획기사]

입신을 꿈꾸는 女戰士

내년 1월 루이와 원양부동산배 결승 대결

진재호 바둑평론가2007-11-16 11:18:41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부천 복사골의 J원장(박지은의 스승)과 함께 한국기원 기사실에 나란히 앉아서 기보를 놓아보던 소녀가 있었다. ‘선머슴아’처럼 머리도 짧았고 자그마한 몸매지만 빈틈없이 당차게 보였다. 박지은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입단하기 이전이니까 10년쯤은 족히 되었을 것 같다.

J원장도 필자와는 대학시절에 만났던 귀한 인연이지만, 그가 키우는 한 소녀의 재주가 워낙 특출하다며 자랑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J원장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제자가 ‘연구생 1조’임을 자랑해서 이전부터 한번 쯤 만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그 유명한 제자를 보자마자 필자는 의자를 슬그머니 당겼다.

“2점은 놓아야 할 거요.”
워낙 자기 제자에 대한 칭찬에 있어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터. 그의 제자사랑에도 그러한 인플레이션이 끼어있지 않나 생각하는 것은 바둑기자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마5단인 내가 2점을 놓으라니, 그러면 7단이란 말인가?’ 그 말을 듣고 고분고분 2점을 놓을 사람이 누구던가. 굳이 흑을 들고 두었다.

첫 출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낀 백돌이 유난히 커보였던 그녀와 신나게 출발했던 바둑. 그러나 그녀는 100수 언저리도 채 못 되어서 바둑은 말이 안 되게 만들어 버린다. 필자는 혹시 누가 구경하러 들어올까 봐서 재빨리 돌을 걷고 말았다. 치수가 맞지 않았다.

지난 주 원양부동산배 결승에 진출하여 대리배에 이어 연속으로 세계대회를 석권할 준비를 하고 있는 10년 후의 당찬 그녀. 한국 여자기사로는 최초로 입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전사’ 박지은을 만났다. 1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 박지은 인터뷰 모습.

소원은?
-키 크는 것이죠.

그럼 잘 먹어야하는데, 치킨 2마리를 다 해치우던 먹성은 어디 갔나?
-아무리 먹어도 안찌는 타입인 것 같아요. 그야 10년 전 얘기인데요.

10년 전 추억을 들추자, 아쉽게도 한국기원 앞에서 치킨을 두 마리나 사주었던 나의 선행에 대해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 반응에 필자가 아쉬워하자 미안했던지 서둘러 수습한다. “누군가 사주시긴 했는데…”

‘연구생 1조’ 출신인데, 당시 여류입단대회가 없었더라도 입단할 수 있었을까?
-그게 훈장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여자연구생 중에 남자연구생만한 성적이 없으니까 자랑스럽기 하죠. 제가 당시 남자연구생과 겨루어서 입단할 가능성은 물론 있었겠죠. 1조면 입단대회에 일단 나갈 자격은 되니까요. 자신감만은 있었어요.

박지은을 얘기하자면 자연스레 10년 전 연구생시절을 얘기해야 한다. 당시 박지은의 기력은 연구생 1조였다. 여자연구생 중에서가 아니라 남자와 같이 겨루었던 연구생들 말이다. 한 번쯤 1조에 오른 것이 아니라 3~4개월 동안 5할 승부를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여자입단대회를 통해 입단했다. 그 무렵 강세를 나타내던 여자연구생 권효진이 연구생 2조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지은이 남자연구생과 겨루어서 입단할 가능성은 30%쯤 되었을 것이라고 당시의 연구생사범이었던 강만우사범의 전언.

힘들게 결승까지 치른 대리배 우승상금이 최근에 들어왔다고 들었다. 상금은 어디에 썼나?
-당연히 부모님께 드렸죠. 부모님은 오랜 동안 식당을 하시면서 절 키우셨어요. 상금은 모두 부모님이 보관하세요. 또한 중국 내 여론형성에 도움을 준 기자 분들께 고마운 생각이 들죠. 그러나 이미 상금은 저의 손을 떠난 지라…. 지금 밥 먹고 있잖아요?(웃음).


▲ 7월 19일에 열린 대리배 결승전 모습. 박지은 8단이 김혜민 5단과 대국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원양부동산배에서 결승에 진출했는데, 쾌속 행진하는 이유는?
-(김)혜민이는 후배고 루이사범님은 늘 극복해야 할 선배님이죠. 사실 혜민이와의 대리배에서도 운이 좋아서 이겼던 것인데, 후배들이 점점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요. 성적을 내는 특별한 이유는 없고, 제가 ‘여자 강자’라는 인식 탓에 상대가 지나치게 주눅이 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루이사범님과는 꼭 이기고 싶어요. 이번에 못 이기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자신이 여자 강자라는 생각 때문에 상대가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을 재차 강조했다. 비근한 예로, 이창호가 앞에 앉으면 상대들은 일단 주눅이 들어 시작을 하게 된 것과 매한가지다. 강자의 프리미엄 같은 것이다. 박지은도 남들이 주목하는 무대 가운데에 서면 ‘파르르’ 입술을 떨던 기억이 있다. 지금 같은 강심장으로 거듭난 것도 다 ‘경험’ 탓이리라.

루이를 꺾어야 진정한 일인자가 된다는 주장에 대해선?
-반은 맞고 반은 아니예요. 루이사범님은 저보다 센 사람이기에 극복대상이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봐요. 남녀 차이는 솔직히 못 느끼고 있어요.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안 느끼려고 하는 편이 옳겠죠. 여자 중에 일인자가 된다는 것은 승부세계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봐요. 루이사범님을 이기면 여자기전에서 우승할 확률이 많기 때문에 조금 더 기쁘기는 하지만요.

싫은 얘기 하나. 조혜연과의 경쟁이 재미있는데?
-경쟁? 아주 많이 뒤지고 있는데…. 저도 모르겠어요. 혜연이는 초반보다도 후반이 더 강해요. 아무래도 저의 기(氣)가 짧아서 그런지 후반으로 가면 혜연이에게 힘들어요. 그래서 초중반에 자꾸 서두르게 되고 실패의 연속이죠. 생각해보면 지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혜연이는 ‘여자 이창호’라는 별명이 참 어울리죠.

조혜연과 박지은은 나란히 97년 입단한 이후 중요한 대국에서 자주 만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다. 두 사람이 최근 만난 것은 삼성화재배 예선 결승으로 이 대결에서도 조혜연이 박지은을 꺾었다. 사람들은 라이벌이라고 부르지만 적어도 박지은에게는 천적과 같은 조혜연이다. 역대전적에서 11승2패로 조혜연이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

내년 1월 한국최초의 여자 입신 여부가 관심인데?
-(처음엔 특별히 9단이 되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가 곧 정정했다.) 내년 1월 속개되는 루이사범님과의 원양부동산배에서 우승을 하면 가능하죠. 이번에야 말로 제가 이겨야 합니다. 루이사범님은 제2의 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최근에 더욱 강하죠. 3개의 여자타이틀을 모조리 석권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강한 상대를 이겨야만 한국최초의 여자 9단이라는 의미가 있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되는 것보다는 내년 1월에 9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자 유창혁’이라는 별명도 있고, ‘살쾡이과’라고 칭하면 듣기 싫은가?
-유창혁사범님 닮았다고 하면 기분 좋죠. 제가 닮고 싶은 선배님이죠. 아마 사나운 기풍 탓이겠죠. 바둑이 늘면 스스로를 지킬 줄도 안다고 하던데, 아직 늘지 않았나 봐요. ‘러시안블루’라는 고양이 아세요? 이왕이면 고운 이름이 좋겠어요. 살쾡이는 이름부터가 좀 사납잖아요.

고양이를 좋아한단다. 개는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것이 싫다고 한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언제든 자립하고자 궁리하는 고양이가 맘에 든단다. 다분히 ‘여전사’ 박지은에게는 개보다는 고양이가 어울릴 테다.

‘아저씨! 돌을 거두시지요?’라고 말하듯 필자를 바라보는 자신만만한 눈길이었다. 그 눈길이 10년 후에도 가끔 TV화면에 등장하곤 한다. 그것까지도 유창혁을 꼭 닮았을까. 필자가 보기엔 꾸준함이 부족한 문제도 있지만 큰 판에는 잘 이기기 때문일 것이다.


큰 판, 주목받은 판이라면 정관장배 대리배 우승도 있다. 그러나 2002년 루이나이웨이와의 치수고치기 10번기(막판 역전으로 10번기를 이겼다.) 2000년 바둑왕전에서 유창혁 조훈현을 이기고 4강까지 진격한 것. 2002년 도요타덴소배에서 요다노리모토를 꺾었던 기억이 난다.

그 뿐 아니다. 박지은은 2003년 4명을 선발하는 신라면배에서도 한국대표로 선발되었고, 천하의 조훈현에게 2전2승을 거둔 바 있는 강타자. 지난 여름에 지지옥션배에서 6연승을 기록 중이던 조훈현을 격침시키던 모습이 기억날 것이다. 세인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는 굵직한 시합들을 박지은은 많이도 이겼다.

“이창호와의 대국이 없어 아쉽다”
바둑대상으로 이름으로 바뀐 지 4년째가 되었지만 변함없이 4년 내내 같은 사람이 수상을 영예를 안은 종목이 하나 있다. 바로 바둑 최고인기상이다. 남자부문에서는 이창호가 2003년 인기기사상이 생겨날 때부터 내리 수상했고, 여자부문에서는 박지은이 계속해서 수상하고 있다. 바로 최고의 인기기사끼리 한 번도 두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가 바람잡이 노릇을 또 한다.
“그럼 이번 연말 타이젬의 이벤트 대국은 결정 났네.”

인터넷 검색창에 박지은이라고 치면 골프선수 박지은이 등장한다. 물론 골프 박지은이 바둑 박지은보다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력대비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 속에서 비교우위 유명세를 띄는 것이리라. 박지은이 2회 연속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5세가 되는 내년 1월 한국 최초의 여자 9단이 되는 날을 상상해 본다.

“바둑 둘 때만은 여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보호받고 좀 못해도 인정받는 것은 승부세계에서 맞지 않는다고 본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당찬 것은 매한가지다. 10년 후에도 당연히 그러리라. 그것은 ‘박지은스러운’ 태도이니까.

총 댓글수: 0새로고침

0/150자등록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