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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수첩]

바둑누아르(noir)시대의 낭만에 대하여

유저수첩 - '창원남자'편

고주사립옹2007-12-23 15: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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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아온 장고
대국실의 로맨티스트 창원남자. 그가 돌아왔다.
1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다음날 새벽 2시. 입장객들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8단 대국실의 그 한적한 공터에서 여지없이 그의 속사권총이 불을 뿜었다.
대화창에 쏟아진 파란 글씨들.
유저들의 소주 안주 타령에 대국 당사자가 불쑥 끼어들면서 시작된 음식이야기는 유명 맛 집, 횟감의 선별 요령, 감성돔 낚시의 포인트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다.
‘대국에나 신경 쓰시죠’ 누가 핀잔이라도 한 방 날릴 만 했지만, 아무도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방 대국자도 창원남자의 그러한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듯 묵묵했다.

그러나 결국, 따로국밥처럼 중반까지 잘 흘러가는 듯 보였던 바둑은 좌상 쪽에서 족히 50집이 넘는 그의 대마가 덜컥 잡히면서 급격하게 기울고 말았다.
“허걱!”
“ㅋㅋㅋ 역쉬 ~”
“이래서 의리배팅은 안 된다니까. 흑흑 내 던, 불쌍한 내 던…”
“이명박 득표율 정도 차이 나네요”
사방에서 짐짓 볼멘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좀 전까지 같이 음식 이야기를 떠들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떠한 말들이 올라와도 개의치 않고, 더러 맞장구까지 치면서 유유히 불리한 바둑을 둬나갔다. 그리고 우중앙의 유일한 약점하나를 물고 늘어져 천지대패를 만들며 막판 대역전에 성공했다.
“아 지저분한 내 바둑의 특질이 여실히 드러나고 마네….”
1년여 동안 타이젬 유저사회 속에서 자취를 감췄던 창원남자. 그의 귀환(歸還) 모습이었다.

8단과 9단의 사이. 때로는 속절없이 7단까지도 밀려 내려가기도 하니 분명 타이젬의 강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대국실에는 마니아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기꺼이 의리배팅을 때리고 장미를 심고 폭죽을 쏘아 올린다. 의리배팅 균일 가는 달랑 1천원. 실은 골수 당원들도 그의 실력을 못 믿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대국보다는 대화를 더 즐기는 거 같다. 낯선 누구와의 이야기든 그의 화제는 끊어지는 법이 없다. 문화인류학과 고전, 각종 레저 스포츠에서부터 세계 각국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대체 모르는 게 뭔지가 궁금해진다. 그래도 해박한 지식과 막힘없는 다변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여성 유저들을 만났을 때다.
“부용과 같은 0000님이 왕림하시니 온 방안이 교교한 달빛을 받은 듯 환하게 밝아지는 거 같구료”
그의 과잉친절과 수다는 금방 도를 넘는다.
그렇다고 그의 실력을 완전 맹탕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종종 중요한 길목에서 심심찮게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꺾는 이변을 연출하곤 했다. 중국의 준키로 이름이 높은 congming1도 jdpx도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기력 30년. 왕년의 알아주던 전국구 아마강자. 바둑의 음지에서 키워온 녹록치 않은 관록과 내공이 그에게 있다. 이미 금간 50줄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게다가 단판 승부가 아니고 10번기 정도로 상대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어떤 상대에게도 쉽게 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2. 원스 어폰 어 타임
고수는 착점하는 손 맵시만 보아도 표가 난다. 그가 바둑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친구의 그 손 맵시에 반해서였다고 한다. 아마도 의연한 어떤 분위기가 그를 사로잡지 않았는가 싶다.
필자가 그를 만난 것은 농심신라면배 2차전 목진석과 요다노리모토의 대결이 있었던 11월 29일 부산 동래에서였다. 부산바둑계의 좌장으로서 행사의 수발을 마친 그와 저녁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는 ‘별로 내세울 게 없다’며 자신의 본명도 얼굴도 밝히지 않기를 원했다.
“나이가 들면서 젊은 한 시절의 근거 없는 자신감, 맹목적인 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어요. 이제는 꿈을 깨고 제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늦었지만…”

풍운아(風雲兒) -
그의 바둑에서도 그 말이 썩 잘 어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낡은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흑백의 비 내리는 화면처럼 흘러간 시간 저편의 이야기.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방내기의 바둑이 두어지던 70년대 말의 음울한 기원의 풍경이 그곳에 들어있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흑백사진’이라는 자전소설로 정리하여 타이젬 논단 ‘19로 공감’에 올렸다. 문장, 구성력, 심리묘사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필자가 보기엔 흠잡을 데 없는 격조를 갖추고 있다. 독자제현의 일독을 강추한다. 그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70년대 말, 군 제대 후 공무원 시험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던 이십대 초반의 청년고수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방내기 바둑을 두기 위해 울산으로 넘어간다. 헝그리 정신과 호승심으로 무장된 그는 낮에는 개인전이나 토너먼트로 주머니를 불리고, 저녁에는 멤버들과 술자리를 같이하며 바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통금이 되면 숙소에서 2차전을 벌이면서 기원문화에 점차 익숙해져간다.
그러던 중 멤버 중 하나인 홍과장의 퇴직금 200만원으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러나 홍과장의 부인이 갓난이를 업고 기원으로 찾아와 울음바다를 만들면서 그 꿈은 깨어지고 만다. 그는 일행의 한 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짱짱한 기원 2급을 6점으로 무리하게 접고 이긴다. 그는 그 한판의 바둑으로 기원 최고수라는 월계관을 쓰지만 내기 바둑계에선 실업자가 되고 만다.


돌이켜보면 70년대의 기원은 당시대 남자들의 최고 놀이터 중 하나였다. 바둑 외에도 마이다시 마작, 포커, 훌라 등 각종 게임이 거의 매일 벌어졌고, 내기바둑을 두는 사람도 많았으며 그 금액도 컸다. 한편 기원마다 고객 유치 경쟁이 벌어지면서 강1급의 고수들은 기료를 면제받는 것은 물론, 자장면이나 담배 다방커피까지 무료로 즐기는 특별 예우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바둑을 더욱 열심히 연구하는 풍토가 스스로 나타났으니 오늘날 영광스러운 한국바둑의 자양은 저 어두운 음지의 기원문화로부터 시작된 부분이 없지 않다 할 것이다.
일부 호사가들의 음풍농월에 놀아나 한국 현대바둑의 영광은 오로지 몇몇의 천재들에 의해 인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입에 개 거품을 물고 소인배의 단견이라고 단호하게 욕하겠다. 유저가 없다면 타이젬이 존속될 수 없듯이 천재를 이해하고 즐기는 두터운 저변이 없었다면 어찌 그가 밥을 구하며 명예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필자는 그 시대를 필름누아르 홍콩누아르처럼 바둑누아르(noir)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 바둑누아르의 시대에 낭만기객들은 어두운 음지의 뒷골목에서 하수의 고혈을 빨아갔지만, 밝은 양지의 천재들을 이해하고 즐김으로서 한국바둑 발전에 그의 포식 절대량을 반납한 훌륭한 조연이었던 것이다.

“하릴없이 부산으로 되돌아와 잠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자영업으로 전환했죠. 좋은 마누라 만나서 오늘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둘 다 바둑 둘 줄은 알지만 10급 정도예요. 억지로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창원남자가 시작한 자영업은 부동산 컨설턴트. 80년대 개발 열풍과 맞물린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특히 건설경기가 치솟았던 88올림픽 직전에는 부산지역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분양하면서 큰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도 잠시. 동업자가 40억의 대형 부도를 내고 도주하면서 지역신문 1면을 장식하는 급반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거의 2년간은 칩거하다시피 했습니다. 사태를 수습하고 정리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데만 수년의 세월이 지나갔죠. 그나마 바둑과 낚시가 큰 위안이 되었군요.”
그는 하염없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고 했다. 포말처럼 무수한 생각이 일어나고 부서졌으리라. 많은 사람이 모이는 모임을 달가워하지 않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일에 낯설어하는 그의 품성은 어쩌면 이때 더욱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3. 가지 않은 길
되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삶의 회한들이 밀려오는가?
숲 속에는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한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렇게 썼다.
창원남자에게도 그러한 망설임이 있었다.
비록 청소부를 자처한 말석이었지만 그는 엄연히 한국 최초 바둑연구실의 일원이었다. 바둑발전의 독지가 권박사가 열었던 당시 고성 병원의 옥탑방에는 뒷날 한국바둑을 호령하는 준재들이 우글거렸다. 임선근(고인), 박상돈, 김기헌, 이주용(고인), 문용직 사범들이 그들이었다.(당시의 분위기는 ‘집시의 노래’가 집필하고 있는 ‘19로 유목민’에 잘 나타나고 있다.)

“군대 갔다 온 직후였네요. 전문기사가 되려는 사람들 틈에서 한 6개월 식객으로 얼쩡거린 겁니다. 그 때 이미 스스로 가야할 길을 알고 있었던 거 같아요. 나와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망설임 끝에 가지 않은 길은 결국, 마음속에 품고 가는 길이 되고 만다. 해마다 쳐내고 없애도 봄이 되면 어느새 다시 솟아오르는 움처럼… 인적이 드문 길 대신 넓은 길을 택하여 공복으로 충실하게 봉직했고 열심히 사업해서 돈을 벌었지만, 그러나 그에겐 늘 가지 않은 길이 문제였다. 수년간 독한 마음으로 바둑을 끊어봤지만 되돌아왔고, 타이젬에서 탈퇴했지만 다시 되돌아와야만 했다.

한번은 대기실 대화창에서 한 사람이 물었다.
“1급이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그러자 다양한 답변들이 주르륵 달렸다.
“500년 쯤?” “대를 이어야” “한 달” “알 수 없어요” “무한대”
필자로서는 가보지 못했지만 한번 쯤 바둑에 미쳐본 사람들만 1급이 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프로기사는 열 번쯤 미친 사람들인가?
예전 최고 명문고에서도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대학 대신 뒷골목 기원의 계단으로 올라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반대로 바둑대회 부상으로 받은 바둑판까지 도합 3개의 바둑판을 뽀개고 나서야 명문대에 진학했다 하던가?
아무튼 참으로 무서운 흡인력과 회귀성을 갖고 있는 놀이가 바둑이다. 고수가 될수록 그 정도는 비례해서 더욱 더 심해진다. 모 방송국에 다니는 유명한 아마 강자가 있다. 그의 방송 생활은 생계유지의 여벌이고 진짜 삶은 바둑에 있다. 더 많은 무슨 예가 필요하랴….


4. 낭만에 대하여

한때 바둑은 ‘제4의 지식’쯤으로 대접받았다. 필자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골프가 고급사교이다 보니 골프 선생을 이너서클의 일원으로 대접하는 그런 이치다. ‘바둑누아르’의 시대에는 양지 쪽 역시 바둑을 지식인이 갖춰야할 필수 교양으로 보았다.
성공한 기업인들은 자신이 좋아서 또 딸린 식구들이 원해서 사내에 앞 다투어 기우회를 만들었고, 바둑의 고수들을 모셨다. 마땅한 수익이 주어졌으며 거기에 존경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아마 강자만 되어도 충분히 존경받고 대접받던 세월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근년에도 바둑의 르네상스가 왔다가 갔다. 타이젬의 머니이전이 자유롭던 시대를 아마 강자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으면서 불은 꺼지고 폭죽은 사라졌다.
그런데, 오늘날 더 잘 구획되고 정비된 타이젬에서 오히려 서먹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관계가 줄어들고 느낌이 자꾸 휘발하면서 서로 정겹게 나누는 낭만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이다.

“되돌아와 보니 고단진의 바둑이 더 세졌네요. 한판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승부나 단위 따위에 집착하고 싶지도 않고, 머 그저 두고 싶은 곳에 둡니다. 원래 방내기로 굳어진 뭉툭한 초식이라 요즘 자꾸 밀리는군요”

그는 요즘 새삼스럽게 사서삼경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필요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그냥 즐겁게 살펴보는 공부. 새벽잠이 줄어들면서 몽유병 환자처럼 새벽마다 모니터를 켜고, 타이젬에 접속해서 투덕투덕 바둑돌을 옮기는 헛헛한 일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서 인가?
필자는 조용필의 ‘상처’가 18번이라는 그와 함께 노래방에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고래고래 한번 불러보고 싶었다.

“낭만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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